Time In Ignorance, ∆T≤720
2020
Review
이채영, 백남준아트센터
720시간 동안 지속되는 연주가 열리는 전시장에는 스피커와 우퍼, 악보가 설치되어 있다. “음악을 시간 안에서 존재하는 소리 건축물이라 생각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공간은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 인간이 들을 수 있는 파장과 그렇지 않은 파장을 오가며 작가들이 작곡한 진동을 연주하고 있다. <Time In Ignorance, ∆T≤720>가 열리는 그곳에서 관객은 사운드의 공명에 자신의 감각을 맞춰본다. 때로는 진동과 공명하여 울리는 공간이, 때로는 가청의 범위를 넘어선 진동으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공간이 그들을 기다릴 수도 있다. 그레이코드와 지인이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인 두 명의 작곡가는 자신들이 상상한 진동과 소리를 시각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붉은 색, 우주 공간의 소리를 상상하여 작곡하고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감각의 중첩과 확장을 도모한다.
그들의 이런 작업은 권석준 교수의 글처럼 시각과 청각 모두 근본적인 어떤 “진동”에서 기인한다는 공통점으로부터 그 다원적인 감각의 공존과 교차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동시대 미술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시각적 우위를 극복하고 다양한 감각의 확장과 교차를 경험하는 예술적 형식을 탐구한다. 비디오, 건축, 음악 등 형식과 장르의 경계는 현대미술의 엄청난 포용력 안으로 흡수되고 융합의 방식을 찾기 시작한 지 오래다. ‘작곡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갤러리와 미술관의 공간에 소리를 채우는 그레이코드와 지인은 루이기 루솔로의 ‘노이즈’에 대한 탐구 이후 다다, 아방가르드 신음악 운동, 플럭서스 작곡가들의 액션 뮤직, 그리고 ‘사운드 아트’라는 청각을 시각적 형태로 구축하는 예술의 여정에 위치한다.
공간을 소리가 구축된 공간으로 상정하는 그리하여 “시간 특정적인” 작업을 선보이는 작가들의 작업의 여정에 백남준의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은 좋은 레퍼런스가 될 것이다. 이 기념비적 전시는 말 그대로 음악을 전시하는, 단순히 청각을 시각화하는 과정뿐 아니라 관객의 참여와 작가의 의도가 결합되어 비결정적이고 우연적인 음악이 연주되는 야심찬 액션-뮤직 작곡가의 인터-미디어 아트 전시였다.
나의 작업은 단순히 소재가 되는 물질을 20kHz에서 40kHz 로 증폭시키는데 그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전자의 물리적 속성(불확정성, 극미립자(입자)와 파동(상태)라는 이중성)을 이용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인간의 지성이 상상하고 감지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로 플라톤 이래로 이어져온 철학의 고전적 이원론인 본질과 실재, 즉 에센시아와 엑시스텐시아의 뺨을 시원하게 후려치는 것이었다. 전자에서는 엑시스텐시아가 곧 에센시아 이기 때문이다. (백남준)1)
파동의 실재, 불확정적인 그 실재가 바로 본질이 된, 최초로 회로가 변형된 텔레비전 13대가 파동이 넘실거렸던 이 전시 공간은 전자기기와 관객이 참여하여 만들어내는 불확정적이고 우연적인 소음, 진동, 음악으로 구축된 건축이었다. 감각이 중첩되고 공감각으로 경험하는 소리 콜라주의 공간이었던 백남준의 전시는 비디오 아트의 시작과 더불어 작곡가 백남준에서 장르와 형식의 구분이 필요 없는 예술가 백남준의 시작을 알린 전시였다.
그레이코드와 지인 작업의 역동성과 실험의 확장 가능성을 고민하면서 백남준의 전시를 언급하는 것은 한 작가가 개진한 실험이 만들어낸 파장과 그 파장이 부여한 창작의 가능성의 폭을 참고하기 위함이다. 그레이코드와 지인의 작업은 단순히 상상한 어떤 소리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을 넘어서 시간과 공간의 교섭, 720시간 길이로 구축된 음악의 허리를 잘라 들어가 랜덤하게 감상해야 하는 관객과 작품의 만남에서 만들어지는 인터랙션을 구축한다. 그것이 작가가 관객과 자신들의 음악이 만나는 방법으로 기대했던 순간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작가들은 실은 이런 방식이 바로 전시에서 연주한다는 것의 한계이자 가능성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그레이코드와 지인에 전제된 수학과 물리의 수식과 원리들은 음악의 근본적인 속성이다. 수의 균형으로 만들어지는 음악은 계산적이고 정확한 차가운 것으로 느껴질지 모르나 실은 전통적으로 신과 접속할 수 있는 매개이자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다. 알고리듬에 근거한 전자 사운드 역시 숫자와 데이터로 만들어진 기계적이고 차가운 소리를 내보내고 있을지 모르나 그레이코드와 지인의 <인클루드 레드>와 같은 작업에서 보듯 시각적 스펙터클과 가청의 영역을 극한대로 밀어 붙이는 압도적인 진동은 관객에게 어느 순간 초월적 경험을 제시하기도 한다. 또한 사운드의 예술적 가능성은 ‘소리’가 지닌 수많은 역사와 삶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에 있다. 침묵을 포한한 사운드는 일상의 리듬, 기억, 종교, 역사를 소환한다. “청각 역시 하나의 시각”처럼 작동하도록 만드는 사운드 아트의 미학적 성취는 가볍지 않다. 유서 깊은 헤르츠 상을 받으며 창조적 가능성을 인정받은 그레이코드와 지인이 사운드에 대한 고유의 실험을 지속, 확장해 나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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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남준, 「《음악의 전시-전자텔레비전》 서문」, 『NJP 리더 #4 - 음악의 전시』, 백남준아트센터 편 (용인: 백남준아트센터 2013), p. 20.
2020
Review
이채영, 백남준아트센터
720시간 동안 지속되는 연주가 열리는 전시장에는 스피커와 우퍼, 악보가 설치되어 있다. “음악을 시간 안에서 존재하는 소리 건축물이라 생각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공간은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 인간이 들을 수 있는 파장과 그렇지 않은 파장을 오가며 작가들이 작곡한 진동을 연주하고 있다. <Time In Ignorance, ∆T≤720>가 열리는 그곳에서 관객은 사운드의 공명에 자신의 감각을 맞춰본다. 때로는 진동과 공명하여 울리는 공간이, 때로는 가청의 범위를 넘어선 진동으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공간이 그들을 기다릴 수도 있다. 그레이코드와 지인이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인 두 명의 작곡가는 자신들이 상상한 진동과 소리를 시각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붉은 색, 우주 공간의 소리를 상상하여 작곡하고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감각의 중첩과 확장을 도모한다.
그들의 이런 작업은 권석준 교수의 글처럼 시각과 청각 모두 근본적인 어떤 “진동”에서 기인한다는 공통점으로부터 그 다원적인 감각의 공존과 교차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동시대 미술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시각적 우위를 극복하고 다양한 감각의 확장과 교차를 경험하는 예술적 형식을 탐구한다. 비디오, 건축, 음악 등 형식과 장르의 경계는 현대미술의 엄청난 포용력 안으로 흡수되고 융합의 방식을 찾기 시작한 지 오래다. ‘작곡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갤러리와 미술관의 공간에 소리를 채우는 그레이코드와 지인은 루이기 루솔로의 ‘노이즈’에 대한 탐구 이후 다다, 아방가르드 신음악 운동, 플럭서스 작곡가들의 액션 뮤직, 그리고 ‘사운드 아트’라는 청각을 시각적 형태로 구축하는 예술의 여정에 위치한다.
공간을 소리가 구축된 공간으로 상정하는 그리하여 “시간 특정적인” 작업을 선보이는 작가들의 작업의 여정에 백남준의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은 좋은 레퍼런스가 될 것이다. 이 기념비적 전시는 말 그대로 음악을 전시하는, 단순히 청각을 시각화하는 과정뿐 아니라 관객의 참여와 작가의 의도가 결합되어 비결정적이고 우연적인 음악이 연주되는 야심찬 액션-뮤직 작곡가의 인터-미디어 아트 전시였다.
나의 작업은 단순히 소재가 되는 물질을 20kHz에서 40kHz 로 증폭시키는데 그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전자의 물리적 속성(불확정성, 극미립자(입자)와 파동(상태)라는 이중성)을 이용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인간의 지성이 상상하고 감지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로 플라톤 이래로 이어져온 철학의 고전적 이원론인 본질과 실재, 즉 에센시아와 엑시스텐시아의 뺨을 시원하게 후려치는 것이었다. 전자에서는 엑시스텐시아가 곧 에센시아 이기 때문이다. (백남준)1)
파동의 실재, 불확정적인 그 실재가 바로 본질이 된, 최초로 회로가 변형된 텔레비전 13대가 파동이 넘실거렸던 이 전시 공간은 전자기기와 관객이 참여하여 만들어내는 불확정적이고 우연적인 소음, 진동, 음악으로 구축된 건축이었다. 감각이 중첩되고 공감각으로 경험하는 소리 콜라주의 공간이었던 백남준의 전시는 비디오 아트의 시작과 더불어 작곡가 백남준에서 장르와 형식의 구분이 필요 없는 예술가 백남준의 시작을 알린 전시였다.
그레이코드와 지인 작업의 역동성과 실험의 확장 가능성을 고민하면서 백남준의 전시를 언급하는 것은 한 작가가 개진한 실험이 만들어낸 파장과 그 파장이 부여한 창작의 가능성의 폭을 참고하기 위함이다. 그레이코드와 지인의 작업은 단순히 상상한 어떤 소리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을 넘어서 시간과 공간의 교섭, 720시간 길이로 구축된 음악의 허리를 잘라 들어가 랜덤하게 감상해야 하는 관객과 작품의 만남에서 만들어지는 인터랙션을 구축한다. 그것이 작가가 관객과 자신들의 음악이 만나는 방법으로 기대했던 순간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작가들은 실은 이런 방식이 바로 전시에서 연주한다는 것의 한계이자 가능성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그레이코드와 지인에 전제된 수학과 물리의 수식과 원리들은 음악의 근본적인 속성이다. 수의 균형으로 만들어지는 음악은 계산적이고 정확한 차가운 것으로 느껴질지 모르나 실은 전통적으로 신과 접속할 수 있는 매개이자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다. 알고리듬에 근거한 전자 사운드 역시 숫자와 데이터로 만들어진 기계적이고 차가운 소리를 내보내고 있을지 모르나 그레이코드와 지인의 <인클루드 레드>와 같은 작업에서 보듯 시각적 스펙터클과 가청의 영역을 극한대로 밀어 붙이는 압도적인 진동은 관객에게 어느 순간 초월적 경험을 제시하기도 한다. 또한 사운드의 예술적 가능성은 ‘소리’가 지닌 수많은 역사와 삶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에 있다. 침묵을 포한한 사운드는 일상의 리듬, 기억, 종교, 역사를 소환한다. “청각 역시 하나의 시각”처럼 작동하도록 만드는 사운드 아트의 미학적 성취는 가볍지 않다. 유서 깊은 헤르츠 상을 받으며 창조적 가능성을 인정받은 그레이코드와 지인이 사운드에 대한 고유의 실험을 지속, 확장해 나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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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남준, 「《음악의 전시-전자텔레비전》 서문」, 『NJP 리더 #4 - 음악의 전시』, 백남준아트센터 편 (용인: 백남준아트센터 2013), p. 20.